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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베트남인으로 우리나라 왕자로 책봉되었고 또 화산이씨의 시조가 된 이용상에 대한 포스팅 입니다.

이용상은 1174년, 지금의 베트남인 안남국 대월의 수도 승룡(하노이)에서, 이조 대월의 제6대 황제 영종의 7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친형이었던 왕이 죽고 어린조카가 즉위를 하였고 거기에 외척인 '진수도'가 실권을 잡으며 자신의 정적들을 죽이고 리용상을 비롯하여 리 왕조의 모든 왕족들을 죽여 이조대월을 멸망시키려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를 간판한 리용상은 배를 타고 최측근과 함께 도피하였고 각고끝에 도착한 곳이 고려의 화산(황해도 옹진군)이었습니다. 바로 베트남 최초의 보트피플이었습니다.

 

화산에 도착한 안남국 왕자 이용상은 때마침 도적들에게 잡혀 가는 고려 백성을 보고서 도적떼를 퇴치하고 사람들을 구해주었고, 옹진현령은 이 사실을 조정에 상주했다고 합니다. 당시 고려의 23대 왕이었던 고종은 안남국 왕자를 크게 치하하며 망명한 이용상이 고려에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재미있는 건 이용상이 고려에 들어올 쯤에, 고종의 꿈에 "큰 새 한 마리가 남쪽에서 날아와 사해 바닷가로 날개를 치고 앉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꿈에서 깨어 사람을 시켜 찾아보았더니, 바로 안남국 왕자 이용상이었다는 속설이 있습니다.

 

여하튼 고종은 이용상에게 식읍을 하사하고 화산군(花山君)으로 봉하였는데요.(식읍은 왕족 등 최고의 귀족이나, 국가에 공을 세운 공신들에 한하여 지급되는 것으로 오늘날의 시,군,구 정도의 규모입니다.)

 

그리고 훗날 화산군 이용상은 자신의 처지를 이해해주고 망국의 왕자를 배려해준 고종에게 보은이라도 하듯 고려에 침입한 몽골군을 격퇴하는데 큰 공을 세웁니다.

 

옹진군 화산동리에 있는 수항문기적비에 적힌 내용에 따르면 이용상은 제갈량 못지 않은 신묘한 계책으로 몽골군을 격퇴하였다고 하는데요.

1253년 12월, 옹진성 동쪽 화산에 몽골군이 쳐들어오자 삼면에 토성으로 성벽을 쌓고 수성전략을 세웠다고 합니다.

 

이용상은 동굴을 파서 땔감과 나무를 비축하고 몽골군이 성벽을 넘으면 돌과 뜨거운 물을 부어 철저히 방비하여 무려 5달동안 버티었고 결국 몽골군을 격파하고 수백명을 포로로 사로잡았다고 합니다.

 

이에 고종은 이용상을 포상하여 관직을 높이고 옹진 화산 지방 30리 인근과 식읍 2천호를 하사받았고 조상의 제사를 지내도록 제수를 많이 내리고 화산관의 문미에 수항문(受降門)이란 글자를 써서 내렸다고 합니다.

 

먼 이국땅이지만 공을 세우며 부와 명예를 얻었지만 이용상은 늘상 저 멀리 있는 조국을 그리워해서인지 조국 방향으로 해마다 제사를 지내며 망향의 아픔을 달래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후손들은 이용상을 시조로 삼아 본관은 화산으로 하였고 현재 화산 이씨는 옹진을 포함한 황해도 남부에 밀집되어 있고, 경상도 안동시, 밀양시, 진주시에도 많이 거주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1967년 남한에 사는 화산 이씨의 25대 후손인 이훈이 (남)베트남 대사관을 방문하여 자신이 베트남의 왕자 이용상의 후손임을 밝혔는데요.

당시 베트남에서는 멸망한 이가왕조에 대한 제사를 지내고 있던터라 이훈씨의 등장은 베트남에서 대서특필이 되기도 하였는데요. 이가의 혈통이 800년 세월을 뛰어넘어 3,600여 km나 떨어진 한국에 부활했다고 대서특필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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