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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우리 나라를 너무 나도 사랑한 푸른눈을 가진 외국인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민족대표 34인 중 유일한 외국인으로 국립현충원에 잠들어 계신 우리 민족의 벗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Frank William Schofield)" 박사님 입니다.

영국 태생 캐나다인인 스코필드 박사님은 소아마비로 왼쪽 팔과 오른쪽 다리가 마비되는 장애가 있었으나 이를 극복하고  세균학 박사가 되며 자국 내에서도 존경받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우리나라에 방문을 한 것은 일제강점기 시절인 1926년!!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의 교장의 초빙으로 우리나라 학생들에게 세균학을 가르치기 위해 방한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 뿐만 아니라 한국어와 한국의 문화를 배우는 등 우리 나라에 깊은 애정을 가졌다고 합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있는 미드 프리즌브레이크의 마이클 스코필드의 별명 '석호필'은 프랭크 윌리엄 박사가 직접 작명한 자신의 한국이름 입니다. 원조 석호필(石虎弼) 입니다.


학교에서 강의를 하던 어느 날 스코필드(석호필) 박사는 지인으로부터 3․1운동의 계획을 전해듣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지인에게 3․1운동을 전 세계에 알려 줄 것을 부탁 받았고 1919년 3월1일 거사 당일 직접 카메라를 들고 "대한독립만세 현장"을 찍으며 3․1운동의 상황을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뿐만 아니라 3.1 항일독립운동이 끝난 후에도 그는 많은 것들을 기록(사진)으로 남겼는데요.

 

특히 일제의 만행 중 하나인 수원 제암리 학살 사건 때에는 직접 마을로 찾아가 참담한 상황을 카메라로 기록하였고 또 이와같은 사실을 선교본부와 영자신문에 보내며 일본의 잔혹한 만행을 전 세계에 알렸습니다.


비록 푸른눈의 이방인이었지만 석호필 박사님은 독립투사와 같은 활동을 펼치다 결국 일본정부로부터 강제 추방을 당하였습니다.

그리고 1945년 마침내 해방을 한 대한민국!! 스코필드 박사는 그 누구보다 더 기뻐하였고 1958년 이승만 대통령의 초청으로 해방 한국에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서울대 수의병리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독재정부를 비판했고 3.1운동 정신을 전파하며 우리나라의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그리고 1968년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박사님은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을 받았고 1970년 4월 12일, 81세의 나이로 서거하셨습니다.

스코필드 박사님은 국립 현충원에 묻히며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대한민국의 한 부분으로 영원히 남게 되었습니다.(현충원에 총3명의 외국인 잠들어 계십니다. 6.25 참전을 했던 화교2명(강혜림,위시팡) 그리고 바로 석호필 박사님 입니다.

“1919년 당시의 젊은이와 늙은이들에게 진 커다란 빚을 잊지 마시오” 이는 스코필드 박사가 서거하기 한 달 전 3․1절을 맞아 신문에 기고한 스코필드 박사의 글입니다.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하였고 독립을 위해 투쟁한 이방인, 기억 되어야 할 잊지 말아야 할 우리 민족의 벗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님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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