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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포스팅은 요도호 항공기 납치사건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970년 3월, 일본 후지산 상공을 비행하던 한 대의 여객기, 그런데 얼마 뒤, 이 여객기는 무장한 남자들에 의해 공중 납치를 당하고 마는데요

 

납치범들의 요구는 뜻 밖에도 평양에 가자는 것이었습니다. 참고로 이들은 전부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란 일본인들이었습니다.

 

 

 요도호 사건개요 

 

1970년 일본 적군파라 칭하는 요원 9명이 승객 등 129명을 태우고 하네다 공항을 출발, 후쿠오카로 향하던 일본항공(JAL) 소속 보잉 727 여객기를 납치해 북한에 망명한 일본 최초의 항공기 공중 납치 사건 입니다.

 

 

 

일본항공은 727 항공기에 강의 이름을 차용해 애칭을 만들어 주었는데요. 그 중 하나가 요도호(요도강-일본최대의 호수)입니다.

 

- 1970년 3월 30일 타미야 타카마로등 9명의 일본 적군파조직은 도쿄발 후쿠오카행 일본항공 351편 요도호(기체 등록번호: JA8315)를 공중 납치했습니다.

 

- 당시 요도호에는 승무원 7명과 승객 등 129명이 타고 있었으며 이들은 일본도와 권총, 폭탄 등의 무기를 들고 승객들을 창가로 몰아세운 뒤 로프로 포박, 기장을 위협하여 북한의 평양으로 갈 것을 요구했습니다.

 

- 범인들의 요구에 기장은 "북한까지 갈 연료가 없다"고 범인들을 설득했고(실제로는 연료가 충분) 연료의 보충을 위해 이타즈케 공항에 비행기를 주기시켰습니다.

 

- 일본경찰은 범인들이 국외로 도망가는 것을 막기 위해 활주로를 막는 등의 공작을 펼치지만, 이것이 범인들을 더욱 자극시켰고 오히려 기장이 범인들을 설득시킨 끝에 여성, 노인, 어린이들, 환자를 포함한 인질 23명을 풀어주게 되었습니다.

  

 

 

 김포공항에 착륙한 요도호

 


요도호는 실제로 38도선은 넘었습니다. 그러나 휴전선이 완전히 38도선에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에, 비행기는 아직 대한민국 영공에 있었습니다.

 

38도선을 넘자 북한에 도착했다고 생각한 기장은, 영어로 "여기는 JAL351편"이라 신호를 보냈고 "여기는 평양 진입 관제"라는 수신이 들어와 지시대로 남쪽으로 회항하였는데 이는 범인들을 속이기 위해 한국 측에서 기지를 쓴 것이었습니다.

 

요도호는 인천 앞바다를 거쳐 서울 김포국제공항에 비상 착륙했습니다. 그리고 김포공항에는 우리군이 인민국 복장으로 위장을 하고 '환영 평양도착'이라는 플랜카드까지 흔들며 납치범들을 현혹시켰습니다.

 

처음엔 속는 듯 했지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범인들은 그들이 착륙한 곳이 평양이 아님을 알았고 북한까지 안전한 비행 보장을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평양으로 떠나기 위해  멈춘 엔진을 재가동시키기 위해선 보조시동기가 필요했지만 한국 측에선 보급을 거부하여 그대로 서울에서 교착상태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날짜를 넘겨 다음날인 31일 야마무라 신지로 운수성 정무차관이 서울에 도착하였고 범인들은 탑승객 전원을 석방하는 대신 야마무라 신지로를 인질로 하는 조건으로 38선을 넘어 북한 평양순안국제공항에 도착하였습니다.

 

 

북한 측은 무기 등의 무장 해제를 요구하여 무기들을 놓고 비행기를 내렸으나 알고보니 범인들이 무장한 일본도, 권총, 폭탄 등은 전부 장난감이었습니다.

 

요도호에 타고 있던 승무원 3명과 인질인 야마무라 차관은 다행히 JAL8351기체와 함께 다음날 일본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요도호 납치사건 범인

 


일본 정부는 그 동안 이들은 납치범(테러리스트)이므로 인도해 줄 것을 북한에 꾸준히 요구해 왔으나 북한측은 이를 거부해 왔습니다.

 

그러나 2001년부터 북한은 요도호 납치범 가족의 귀국을 허용하여, 몇 차례 귀국이 이루어졌으며, 2004년 북한은 요도호 문제는 일본 정부측과 적군파 구성원들 사이의 문제이니 납치범을 일본으로 보낼 수 있다고 밝혔습니다.

 

현재 주모자 등 3명이 사망하고 당시 16세였던 시바타 야스히로는 1988년 일본에 잠입해 지하활동을 벌이다 체포되어 형기를 마치고 오카사에 살고 있으며 1명은 2000년 태국에서 달러위조 혐의로 체포되어 일본으로 송환돼 재판을 받았습니다.

 

 

참고로 이들은 40여년이 흐른 지난 2011년 인질 중 한명에게 사죄의 편지를 보내기도 했으며 현재 북한에는 나머지 4명의 범인(코니시 다카야스, 아카기 시로, 와카바야시 모리아키), 아베 기미히로)과 그들의 일본인 가족들이 살고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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