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이번 포스팅은 인도네시아 교과서에 실린 조선인 영웅 '양칠성'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양칠성은 1919년 전북 완주 출신으로 그가 포로감시원으로 인도네시아로 간 것은 1942년이었습니다.

 

 

당시 일제는 백인포로들의 감시를 맡기기 위해 조선인 포로감시원을 선발하였고 군인으로 징병되어 끌려가 총알받이로 죽음을 당하는 것보다 좋은 조건이다 보니 많은 조선인들이 지원을 하였습니다.

 

일본이 패망한 이후 태평양전쟁을 주도한 일본 군부의 거물급들은 ‘A급 전범'으로 처형되었으며, 양칠성 같은 포로감시원 역시 연합군 포로 학대혐의로 전범재판소에 서게 되었습니다.

 

재판 당시 이들의 신분은 일본인이었으나 일본으로부터 그 어떤 변론이나 신변보호도 받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일본에서는 조선인(한국인)이라는 이유로 무시를 받았고, 한국에서는 친일파로 인식돼 보호는 커녕 버림을 받았습니다.

 

양칠성은 전범 용의자로 붙잡히기 전에 극적으로 일본군을 탈주하였으나 고국으로 돌아오지 않았고 현지의 여인과 결혼을 하여 인도네시아에 가정을 꾸렸습니다.

 

'칼리만탄의 왕' 양칠성

 

인도네시아는 원래 일본군이 점령하기 전까지 350년 동안 네덜란드의 식민지였습니다. 그리고 일본이 패전하자 네덜란드는 빼앗겼던 인도네시아를 다시 되찾으려 했습니다.

 

 

이에 양칠성은 게릴라부대인 ‘팡에란 바팍’(왕자부대)을 이끌고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위해 네덜란드 군대와 싸웠습니다. 

 

혁혁한 전과를 올리며 ‘칼리만탄의 왕'이라 불리우던 그는 아쉽게도 1948년 11월 네덜란드 정부군에 체포되었고 이듬해 8월 총살 되고 말았습니다.

 

 

다행히 그의 공적은 사망 26년 만인 75년 11월, 인도네시아군 고위 장성이 된 옛 독립운동 동료들의 노력으로 세상에 공개되었으며 인도네시아 정부는 그를 ‘외국인 독립영웅' 으로 추대, 자카르타의 칼리바타 국립묘지에 안장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묘비에는 양칠성이 아닌 일본인 "야나카와 시치세이"라 적혀 있었습니다.

 

 

일본인을 통해 드러난 조선인 양칠성!!

 

양칠성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 일등공식은 바로 일본인이었습니다.

 

 

일본인 3명이 현지에서 ‘독립영웅’으로 추대된 1975년 당시(일본군 중 일부도 인도네시아 독립운동에 가담하였습니다.) 일본어 통역을 맡고 있었던 무라이 교수는 3명 중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한명의 행적을 추적하던 중 그가 ‘양칠성’이라는 이름의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후 일본으로 돌아온 무라이 교수는 자바수용소에서 포로감시원을 지낸 조선인들의 단체인 ‘동진회’를 통해 양칠성의 유족을 추적하였고 우쓰미 아이코 교수가 '삼천리'라는 잡지에 ‘인도네시아 영웅이 된 조선인’이란 제목으로 양칠성에 대한 투고를 하였습니다.

결국 양칠성이 조카인 것 같다는 사람이 나타났고 1978년에 직접 방한하여 유족들에게 인도네시아 영웅묘지에 그가 뭍혀 있다는 사실을 알리게 되었습니다.

 

 

1995년 8월 19일 양칠성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는 묘비로 교체되었습니다.

댓글